병원비 부담 두고 형제 간 다툼? 부양의무 법률로 살펴보기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돌보는 일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오랜 병원 치료 끝에 세상을 떠나신 후, 남겨진 병원비를 두고 형제자매 간에 날선 말들이 오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전해 듣게 됩니다. 감정이 섞인 갈등은 시간과 돈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 병원비를 법적으로 누가 부담해야 하느냐입니다. 누구는 ‘자식이면 당연히 나눠 내야지’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누구는 ‘형이 다 알아서 했잖아’라며 반박합니다. 감정이 실린 주장들이 오갈수록 갈등은 깊어지고, 결국 병원비는 가족 간 소송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의 병원비는 법적으로 누가 책임져야 할까요? 그리고 그 병원비, 정말 부양의무와 관계가 있는 걸까요?


부양의무는 살아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법률에서 말하는 ‘부양의무’는 단지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민법 제974조 이하에 명시된 법적 의무입니다. 직계혈족 간, 그리고 생계를 같이 하는 가족 간에 서로를 부양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자녀는 부모님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거나 질병으로 치료가 필요할 경우, 경제적 도움을 줄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부양의무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만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님이 사망한 이후의 상황에는 ‘부양의무’가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이후의 병원비 문제는 ‘상속’과 관련된 법률 문제로 바뀌게 됩니다.


병원비는 채무, 즉 계약 관계의 산물입니다

병원비는 원칙적으로 환자, 즉 부모님과 병원 간의 계약에 따라 발생한 비용입니다. 병원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환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관계인 것이죠. 따라서 병원비는 부모님의 개인 채무로 보는 것이 법적으로 맞습니다.

이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그 채무는 상속인에게 승계됩니다. 민법 제1005조에 따라 상속은 사망과 동시에 개시되고, 상속인은 사망자의 재산뿐 아니라 채무도 함께 물려받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상속인이 상속을 ‘받는 경우에만’ 채무를 부담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속을 포기하거나 한정승인을 하면 병원비를 부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정승인을 선택하면 상속받은 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채무를 변제하면 되고, 상속포기를 하면 채무 전부를 회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선택은 부모님이 사망한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해야 합니다.


보호자 서명, 함부로 하지 마세요

여기서 흔히 간과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병원에서 보호자 명의로 입원동의서나 병원비 보증서를 작성할 때, 자녀 중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서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서명 하나가 법적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기억해야 합니다.

병원 입장에서는 보호자가 보증인 또는 계약 당사자로 인식될 수 있고, 실제로 법원은 보호자가 병원비를 일부 부담해야 한다고 판단한 사례도 있습니다. 단순한 가족관계로 인해 병원비를 자동으로 부담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계약서상의 서명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니 병원비 부담과 관련된 문서에 서명할 때는 반드시 내용을 확인하고, ‘보증인’이나 ‘연대 납부인’으로 표기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명의 하나로 뒤따를 수 있는 부담은 생각보다 클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간 병원비 분담, 강제할 수 있을까?

자, 그럼 병원비를 특정 형제가 전부 부담한 상황에서, 다른 형제에게 “같이 내자”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법적으로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비는 부모님과 병원 간 계약으로 생긴 채무이고, 이를 대신 낸 자녀가 다른 형제들에게 병원비를 요구하려면 ‘채무부담의 약정’이나 ‘기여분’ 인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간 병원비 분담에 대한 별도의 합의가 없었다면, 법원은 이를 단순한 가족 간의 호의로 해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부양의무가 있으니 같이 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사망 이후 병원비에 대한 책임으로는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다만, 자녀 중 누군가가 장기간 부모님을 간병하며 병원비와 생활비를 전담한 경우, 그 기여분을 인정받아 상속에서 유리한 지분을 청구할 수는 있습니다. 이를 ‘기여분 청구’라 하며, 법원에 별도 청구를 통해 인정받아야 합니다.


갈등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조언

갈등은 미리 대비하면 줄일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조언을 몇 가지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입원 시 병원비 계약서류 꼼꼼히 확인하기
    보호자 서명은 신중히 하셔야 합니다. 보증책임이 발생할 수 있으니, 반드시 내용을 숙지한 후 서명하시기 바랍니다.

  2. 자녀들 간 비용 분담 사전 협의 및 서면화
    부모님이 입원하셨을 때부터 자녀들 간 역할 분담과 병원비 부담 방식을 명확히 정해두고, 가능하면 서면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3. 부모님 사망 후 3개월 내에 상속 포기 또는 한정승인 여부 결정
    병원비뿐 아니라 다른 채무가 있는 경우, 이를 피하거나 제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한 내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4. 가족회의를 통한 정리와 기록
    부모님의 병세가 깊어질 경우, 감정적인 대화보다는 객관적인 기록과 합의가 필요합니다. 누구든 예기치 않게 혼자 모든 걸 떠안게 되는 상황은 피해야 합니다.


법은 가족 사이의 정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가족끼리 그런 걸 따지냐’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갈등이 생기면, 결국 따지게 되는 건 법입니다. 병원비를 두고 가족이 얼굴 붉히는 일은 되도록 피해야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애초에 법적 구조를 이해하고 준비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부양의무는 정서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법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병원비는 계약에 기반한 채무로서, 책임의 주체가 명확히 구분됩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아야, 슬픔 이후의 분쟁도 피할 수 있습니다.